스페인, 성범죄 적용 및 처벌 강화 법안 승인
        등록일 2021-08-30

        스페인, 성범죄 적용 및 처벌 강화 법안 승인  

        곽서희 Erasmus University Rotterdam 박사과정

        • 2021년 7월 초, 스페인 정부는 성폭력에 관한 정의를 개정하고 피해자 지원 및 성범죄 예방을 다각도로 확대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이번에 정부에서 승인한 법은 기존의 성범죄를 보다 엄격한 방향으로 규제하고 처벌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동 법안은 의회의 최종 논의 및 투표를 거쳐야 하며, 2021년 연말 이전에 이뤄질 예정이다.
        • 현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총리가 이끄는 스페인 정부는 정책 개발 및 이행에 있어 성평등, 여성의 권익 향상에 중점을 두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번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 산체스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여성에게 더욱 안전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 특히 이번 법안은 지난 2016년 다섯 명의 남성이 18세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여 스페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등법원에서는 성폭행이라 보지 않고 훨씬 경미한 수준의 성추행(sexual abuse)이라고 해당 사건을 해석했으며, 그에 따라 9년형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판결 근거는 피고인들이 당시 상황을 녹화했는데 판사는 피해자가 반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에 따라 성행위에 합의한 것이라고 해석한 데서 비롯됐다. 판결이 발표된 이후 사회적으로 큰 공분이 일었으며 스페인 곳곳에서 성폭행을 재정의하고 관련 처벌 법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라 열렸다. 이후 검찰이 항소하면서 사건은 대법원으로 송부되었으며, 대법원에서는 만장일치로 고등법원의 원심 9년형에서 형량을 늘려 15년형, 피해자에게 총 10만 유로(한화 약 1억 3천만원)를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 현 스페인 형법 제 178조는 폭력이나 위협을 사용해 타인의 성적 자유에 반하는 행위를 성추행(sexual assault)으로 보고 1-5년형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형법 제 179조에서 강간(rape)은 6-12년형으로 명시하고 있다. 일부 특수 상황에 해당하는 경우 형량은 12-15년형으로 늘어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명백하게 비인륜적 폭행이나 위협, 2인 이상의 가해 행위, 장애나 질병이 있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경우 등이 포함된다. 직장이나 학교 등과 같은 기관에서 성적 접촉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성추행 행위의 경우 형법 제 184조에서 3-5개월 징역형이나 벌금형, 특히 고용이나 업무상의 수직관계를 이용한 성추행은 5-7개월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스페인의 기존 형법에서 이미 합의 없이 상대방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는 성추행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나, 형법에서 '합의'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부분이 없다. 특히 성폭행의 경우 가해자가 신체적 폭력이나 위협을 가한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 한해 강간죄가 인정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는 폭력이나 위협을 겪었고 저항했다는 점을 입증해야만 했다.
        • 이번에 정부에서 승인한 법안은 성관계에서 합의가 관건이며, 개인의 의지를 자발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했을 때에 한해 합의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스페인어로는 "solo sí es sí (only yes means yes),” 즉 명백하게 합의한 경우에만 진정한 합의이며, 합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 이번 법안이 승인된 이후 이레네 몬테로(Irene Montero) 평등부 장관(Equality Minister)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새 법안에서는 피해자를 위주로 사건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진일보 하는 법이 될 것이며, 피해 당시 침묵하거나 수동적이었다고 해서 피해자가 합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명백한 합의 없이 이뤄지는 성관계는 모두 강간으로 규정한다는 내용 이외에도 성범죄 관련 규정 범위가 한층 확대되었다. 이번 법안은 공공장소에서 성희롱하는 캣콜링(catcalling), 스토킹, 강제 결혼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다. 공공장소 성추행 범죄의 경우 벌금, 가택연금, 사회봉사와 같은 처벌을 받게 될 수 있다.
        • 또한 24시간 성추행 피해 신고전화 서비스 운영, 미성년자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쉼터 운영 등의 조치도 이번 법안에 포함됐다. 현재 스페인에서는 정부의 100% 예산 지원으로 운영되는 젠더기반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무료 24시간 핫라인 전화 서비스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해당 핫라인은 주로 가정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응급상황 대처요령 안내, 상담 및 유관기관 연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법안에서는 성추행 피해 전담 신고 및 상담 서비스 라인을 명시하고 있다.
        • 그리고 성범죄 피해자 중 최저임금 보다 적은 소득을 벌던 피해자가 실직하는 경우에는 약 6개월 정도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장애가 있거나 돌봐야 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는 경우에는 그 지원을 보다 확대하여 제공하는 제도도 포함되었다.
        • 또한 이번 법안에서는 초등, 중등, 고등학교 모든 수준에서 학년별 맞춤형 성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제도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되었다. 지난 몇 년 간 스페인에서는 성적 다양성에 관한 교육이 큰 화두였다. 작년 초, 스페인 자치주 중 하나인 무르시아(Murcia)에서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제, 예를 들어 성적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수업시간에는 부모가 원하면 본인의 자녀를 수업을 듣지 않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중앙정부 측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간의 갈등이 표면 위로 드러났고, 무르시아 주민 수천 명이 집결하여 대규모 거리행진 시위를 개최하는 사태도 발생한 바 있다.
        • 이후 작년 연말, 스페인 의회는 새로 개정한 교육법을 가결시켰으며 6세 이상 아동 및 청소년 대상 성교육 의무화, 동 법안에서는 지방 정부의 자율적인 교육 결정 및 운영권을 부여하면서도 교육제도에서 부모의 개입 축소화하는 조항이 포함되기도 했다. 당시 보수주의 성향의 정당, 학부모 연합, 교사연합, 종교 단체 등 일각에서는 기존의 도덕적, 사회 규범 가치를 주장하면서 성적, 성적 정체성에 관한 교육 의무화 도입을 반대했다.
        • 이번에 정부가 승인한 법안은 성폭행에 관한 규정에 있어 합의 여부를 명백하게 중점에 두고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고 형량을 강화하는 데다, 성범죄 피해 지원 서비스 및 예방 관련 정책을 보다 폭넓게 마련했다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의회에서 최종 논의 및 투표가 남아있는 만큼 앞으로 본 법안의 가결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