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가정폭력 피해자, 약국에서 ‘암호’ 사용해 도움 요청한다
황수영 브리스톨대학교 공공정책 석사
○ 영국 정부는 2021년 1월 14일부터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약국에서 암호를 사용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한다. 영국에서 코로나19로 전국 봉쇄령이 내려진 뒤 가정폭력 피해 신고 건수가 증가하고, 가정폭력 의심 사망사고까지 발생하자 영국 정부가 피해자 지원단체의 목소리를 수용해 해당 정책을 마련한 것이다.
? 영국 전역 2,855개 약국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사용할 암호는 ‘ANI’다. 만약 누군가 약국 직원에게 ANI라는 암호를 사용하면 약국 직원이 도움을 청한 사람을 약국 상담실과 같은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이야기를 나눈 뒤 경찰이나 피해자 지원단체 등으로 연결한다. 전국 모든 약국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들은 ‘The Ask for ANI’라는 정책에 참여한 약국에서만 관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월 14일 기준으로 영국의 약국 체인점인 Boots 2,300곳, 개인 약국 255곳이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현재 영국 정부가 온라인으로 정책에 참여할 약국을 추가 모집하고 있어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 동네 약국을 가정폭력 피해 신고 거점이 된 것은 약국의 접근성 때문이다. 약국 체인점인 Boots는 약뿐 아니라 간단한 식료품, 생필품, 화장품 등을 모두 판매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편의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편의점처럼 동네 곳곳에 있어 피해자들이 접근하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영국 정부는 약국 안에는 정책 홍보 자료를 배치하고, 밖에는 ‘Ask for ANI 참여 약국’이라고 별도로 표시해 피해자 참여를 독려할 방침이다.
? 약국이나 슈퍼마켓 같은 시설을 가정폭력 피해자 신고 거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단체 쪽에서 먼저 나왔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위기 아동 등을 돕는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Hestia는 지난해 ‘Safe Spaces’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 역시 영국의 유명 약국 체인점인 Boots, Superdurg, Morrisons과 협업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약국 상담실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 정부의 Ask for ANI와 비슷하다.
? 민간에서 시행되던 프로그램이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지난해 4월부터다. 지난해 4월, 영국에서 영국 봉쇄령 내려진 뒤 3주 만에 여성 16명이 가정폭력이 숨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코로나 19와 가정폭력의 연관성이 알려졌고, 같은 달 열린 영국 내무성 특별위원회 화상회의에서 약국이나 슈퍼마켓에서 암호를 사용해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자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데임 베라 바일드 영국 웨일스 가정폭력 피해자 경찰 국장은 회의에서 “슈퍼마켓 직원과 가정폭력 피해자가 그들끼리만 아는 비밀 코드를 만들어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하였고, 지난해 5월 21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주재한 화상 회의인 ‘Hidden Harms Summit’에서 정책의 윤곽이 잡혔다. 이 회의는 코로나 19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피해자를 위한 정부 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존슨 총리를 비롯해 국가범죄국(National Crime Agency), 국가경찰청장협의회(National Police Chiefs’ Council), 아동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 등이 회의에 참여했다. 이날 회의에서 영국 정부는 전국약국연합(the National Pharmacy Association), 영국소매협회(British Retail Consortium)과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가 협업해 ASK for ANI 정책을 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코로나 19로 타격을 받은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에 200만 파운드(한화 약 31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 이와 함께 영국 정부는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가해자의 보석 기준을 강화해 피해자 보호에 더 힘쓰기로 했다. 영국 내무성은 1월 14일, ‘기소 전 보석에 대한 정부 입장(Police Powers: Pre-charge Bail Government Response)’라는 보고서를 통해 The Ask for ANI 정책과 함께 기소 전 보석(pre-charge bail)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공개했다.
? 영국에서 경찰 보석(police bail)이라고 더 잘 알려진 기소 전 보석이란 범죄 혐의가 있는 피의자를 경찰이 체포한 뒤 혐의를 입증할 추가 증거나 수사 자료가 없어 더 구치소에 수감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이럴 경우 경찰은 체포한 피의자를 풀어줘야 해 피의자가 피해자를 다시 찾아가 위협하거나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는 법의 허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개정안에 따르면, 경찰은 가정폭력, 성폭행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피의자들은 피해자나 증인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기소 전 보석 기준과 절차를 더 강화된다.
○ 프리티 파텔 영국 내무장관은 “Ask for ANI 정책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받고, 기소 전 보석 제도를 개선해 가정폭력 피의자들이 피해자와 다른 시민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두 정책의 의미를 설명했다.
<참고자료>
■ GOV.UK(2021.1.14.), “Pharmacies launch codeword scheme to offer lifeline to domestic abuse victims”, https://www.gov.uk/government/news/pharmacies-launch-codeword-scheme-to-offer-lifeline-to-domestic-abuse-victims (접속일: 2021.1.20.)
■ GOV.UK(2021.5.21.), “New measures announced ahead of hidden harms summit”, https://www.gov.uk/government/news/new-measures-announced-ahead-of-hidden-harms-summit (접속일: 2021.1.20.)
■ UK Parliament(2020.4.14.), “Impact of Covid-19 (Coronavirus) on domestic and child abuse examined”, https://committees.parliament.uk/work/184/home-office-preparedness-for-covid19-coronavirus/news/114837/impact-of-covid19-coronavirus-on-domestic-and-child-abuse-examined/ (접속일: 2021.1.20.)
■ Home Office(2021.1.14.), “Police Powers: Pre-charge Bail Government Response”, https://assets.publishing.service.gov.uk/government/uploads/system/uploads/attachment_data/file/951847/2020-01-14_Response_to_PCB_consultation.pdf(접속일: 20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