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한국 간호요원회 창립 30주년>
        등록일 2002-10-13

        독일 베를린 간호요원회(회장 권옥선)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12일 베를린
        노이쾰른구 문화회관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황원탁 독일 주재 대사를 비롯해 베를린 시 외국인담당관 등
        여러 손님들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그러나 이날 자리는 기념식이 아니라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센 간호요원회 회원들과 교민들이 어울려 지난 30여년간
        독일 땅에서 살며 겪은 애환을 되돌아보며 즐긴 축제의 자리였다.

        베를린 간호요원회의 역사와 회원들의 삶은 이른바 파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의
        역정과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단면을 증언해준다. 동서 냉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66년 10월15일 동독 속의 섬이었던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한국의 간호요원
        1천126명이 처음으로 도착했다. 이에 앞서 60년부터 가톨릭 교회를 통해 일부
        한국 간호요원들이 서독에 오기는 했으나 대규모 공식 `파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낯선 외국 땅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꽃다운 나이의, 특히 여성인 이들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베를린 간호요원회 제20대 회장인 권옥선(66)씨는 한국과 달리
        보호자가 병원을 잠깐 다녀가고 나면 모든 일을 간호사가 해야 하고, 업무 중에
        힘든 일이 많아 체구가 작은 한국 여성으로서는 매우 고생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이영우(56) 부회장은 처음엔 언어장벽 외에도 문화와 가치관, 행동방식 등
        모든 것이 다른 독일 사회에 적응하는 일도 무척 힘겨웠다고 말했다.

        힘겹고 외로운 생활 속에서 서로 만나 모처럼 우리 말로 대화하며 서로를 위안하던
        이들은 72년 독일 전역에서 최초로 한국인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추후 간호 조무사회와 통합해 서베를린 간호요원회로 개칭됐다.
        73년 말에는 독일 전역 452개 병원에 6천124명의 한국 간호요원이 파견됐으며
        이 가운데 베를린에 2천여 명이 자리를 잡았다.

        1960년에서 정부 차원의 간호원 공식 파독이 끝나는 76년까지 17년간 인원은
        총 1만226명에 이른다. 베를린에 이어 각 지역에 간호요원회가 설립됐으며,
        지난 86년엔 재독간호연합회가 창설됐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 병원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다. 작은 체구의 동양 여성들은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고 부지런히 일해 의사들의 인정을 받았다. 상당수가
        수간호사로 승진했으며, 전문 자격증을 따거나 의과대학에 진학, 의사가 된 경우도
        많다. 백영훈 산업관리공단 이사장은 최근 간호사협회지에 기고한 글에서,
        박 대통령이 61년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경제원조를
        얻어내기까지에는 파독 간호요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박정희 전 대통령 독일 방문 당시 수행했던 백 이사장은 이미 60년부터 일부
        진출해 있던 한국 간호요원들에 대해 당시 서독 언론들은 대서특필하며 매우
        좋은 평가를 했다고 회고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가던 서독은 61년 한국에
        1억5천만마르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려 했으나, 당시 국민총소득 87달러,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2천300만달러, 실업률 23%, 물가상승률 42%, 저축률 3%의
        극빈국이었던 우리 나라를 보증서줄 외국 은행이 없다는 것이 장애였다.
        그러나 3년 동안 간호요원 2천 명, 광부 5천 명을 파독하고 이들의 봉급 국내송금
        창구를 독일 은행 코메르츠방크가 맡는 조건으로 이 은행이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차관을 제공받게 됐다. 파독 간호요원들과 광부들은 돈을 벌거나 외국에 나가보기
        위해 독일로 왔지만 열심히 일해 받은 봉급을 아껴 대부분 국내 가족에게 송금함으로써
        한국 외환보유고 증가와 경제발전에 또다시 기여했다. 정해본 홍익대 교수에 따르면
        67년 당시 송금액이 한국 상품 수출액의 35.9%, 무역외 수입의 30.6%를 차지했다.
        파독 간호요원들은 73년 석유파동 이후 독일의 대외국인 정책이 엄격해지고 본국
        정부의 도움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독일 노동력 부족을
        메우고 경제발전에 기여했음을 내세우며 항의시위도 활발히 벌여 78년부터는 매년
        체류기간 갱신을 하지 않아도 됐다. 파독 간호요원 가운데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미국 등 제3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독일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현재 유럽 지역 교민 7만여 명 가운데 40%를 차지하는 독일 교민의 대부분은 이들
        간호요원과 광부, 그리고 이들의 2-3세다.

        파독 간호요원들은 독일에는 한국의 민간대사이자 한국인에게는 독일에 대한 이해를
        촉진했으며, 가난하고 힘든 유학생들에게는 때로 따뜻한 어머니 역할을 했다.
        또 동백림 사건 등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지속적으로 일해오고 있다.